빈 특유의 블록형 집합주택인 '호프하우스'는 17세기 이후 빈 시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도시형 주택이었습니다. 도시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호프하우스는 규모가 커지고 일반화되었습니다.
1857년, 빈의 구도심을 둘러싸던 성곽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링슈트라세가 생기면서 주변에는 상류층을 위한 호프하우스들이 연이어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건물들은 규모가 크고 장중한 고전주의적 외관을 지니는, 궁전과 같은 건물들로, 중앙에 1-3개의 중정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서민용 집합주택 중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이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는 189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취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구빈주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념 주택'들은 상류층 호프하우스에 버금가는 규모와 기념비적인 외관을 자랑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붉은 빈'에서 건설한 노동자 집합주택 '게마인데바우'의 직접적인 선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노동자 집합주택 '게마인데바우'는 19세기 구빈주택과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여러모로 향상된 주거 형식이었습니다. 십구세기 구빈주택의 중정은 폐쇄적이었던 반면, 게마인데바우의 중정은 개방되어 도시공간의 일부로 활용되었습니다. 건물 내의 모든 단위주택으로의 진입을 개방된 중정을 통하게 하여, 중정은 주거공간의 일부이자 도시의 공공장소로 기능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물은 개방적인 중정 덕분에 적절한 영역적 위계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공적 공간인 도로에서 반공적 공간인 중정을 거쳐 반사적 공간인 계단과 복도를 통해 사적 공간인 단위주택으로 진입하는 단계적 구성이 이루어지면서 공간의 위계가 분명한 집합주택이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단위주택에 수도, 가스, 화장실을 완비하고 채광과 통풍이 잘 되도록 함으로써 과거의 구빈주택보다 훨씬 향상된 주거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사회주의 정부에서는 1923년에 노동자 집합주택의 형식과 환경에 관해 일정한 기준을 수립했습니다. 건물의 규모, 설비, 진입 방식, 방향, 내부의 공간구성 등에 관한 것으로, 기준에 맞게 적용된 건물을 '빈 공공주택의 유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로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복도가 사라진 점이었습니다.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 주택이 배열된 과거의 민간 아파트의 문제점이 없어진 것입니다. 모든 주택은 계단실을 통해 진입했습니다. 하나의 계단실을 네 주택이 사용했는데, 두 주택은 길에 면하고, 두 주택은 중정에 면했습니다. 모든 주택에 채광과 통풍이 되도록 하여, 과거의 서민주택과 비교하면 대단한 향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단위주택은 작게는 38제곱미터, 크게는 48제곱미터, 두 유형이 표준형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작은 주택에는 현관, 거실 겸 부엌, 20제곱미터 크기의 커다란 방이 있었고, 큰 주택에는 작은 방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1924년에서 1927년 사이에 지어진 공공주택에서 단위주택의 75퍼센트는 작은 규모로, 그리고 25퍼센트는 큰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주택의 내부 시설에도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공동화장실 대신 모든 주택의 내부에 화장실을 제공했습니다. 부엌도 개선되었습니다.
이후 빈에는 다수의 게마인데바우가 건설되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구성은 건물이 사각형 블록을 완전히 둘러싸는 것으로, 이는 블록형 집합주택의 기본형이었습니다. 카를 엔이 1925년에 계획한 베벨호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벨호프는 중정을 완전히 비웠으며, 공공시설도 중정 주변에 두지 않았습니다. 공공시설은 길에 면한 1층에 배치하고, 그 위의 주택은 뒤로 후퇴시킨 후 긴 발코니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기본형은 수없이 많은 변형이 있었습니다. 대지가 좁고 긴 경우에는 중정을 완전히 둘러싸는 건물보다 자형을 취하면서 개방된 앞마당을 두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레오폴트 시모니가 계획한 시모니호프는 그런 사례였습니다. 시모니는 자와 자의 중간 정도로 건물을 개방했으며, 길에서 바로 연결되는 전정표과 중정 사이에 3미터 정도의 단차를 둠으로써 중정을 위요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빈의 게마인데바우는 본질적으로 도시건축이었습니다. 건축가들은 다양한 계획상의 변화와 자유를 추구했지만 어디까지나 도시적 상황에 맞추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건물은 도시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건물이 도시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게마인데바우가 시장, 광장, 그리고 공원을 위요하는 형식으로 자리했습니다. '헤르더플라츠 지구'가 그중 세련된 사례의 하나로 꼽힙니다. 1907년 빈 제11구에 새로 계획된 광장 헤르더플라츠가 제일차세계대전 이후 학교가 중앙에 자리하며 광장 주변으로 네 채의 노동자 아파트가 건축되었습니다. 1924년에서 1929년 사이에 여러 건축가들이 각기 다른 건물을 계획했는데, 모든 건물의 형상은 타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광장을 향하는 모든 건물의 표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상층부에는 주택의 발코니를, 그리고 저층부에는 여러 시설을 배치함으로써 광장은 강력한 도시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게마인데바우는 대부분 상징적인 형태로 건축되었습니다. 후베르트 게스너가 계획한 '리우만호프'는 그 시작점으로서 바로크 시대의 궁전을 연상시킵니다. 건물은 길을 경계로 하여 거대한 하이든 공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붉은 빈의 첫번째 시장 야콥 리우만의 이름을 딴 이 건물의 중앙에는 높은 탑상형 건물이 광장을 향해 서 있고, 양쪽에는 중정을 둘러싸는 블록형 집합주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원래 게스너는 탑상형 건물의 높이를 12층으로 해서 주변의 6층 건물과 차이를 두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건물의 높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빈에는 뉴욕과 같은 마천루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게스너는 건물의 높이를 8층으로 낮추었습니다. 어쨌든 이 건물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의 링슈트라세'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도 링슈트라세 주변의 상류층 아파트들처럼 상징적으로 지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 참조서적 : 손세관, 이십세기 집합주택 근대 공동주거 백년의 역사, 열화당,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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